반응형 전체 글19912 "일본 조선 어느 쪽이 좋은가?" 윤치호의 물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1919.4.27(일) 오후 늦게 개모리와키 개성경찰서장을 방문했다…철도공원 벚꽃이 만개해 절정에 달했다. 불과 7, 8년 전 만 해도 이곳은 나무도 없고 보기고 흉한, 삭막한 곳이었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이곳을 대단히 매혹적인 공원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만약 이 동산에 신령이 있다면, 어디 한 번 좀 물어보자. 일본 정권과 조선 정권 중에서 어느 쪽이 좋으냐고. 김상태 편역, 《윤치호 일기 1916~1943) 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시기》, 역사비평사, 2001.2, 107쪽. 이 물음이 왜 여전히 유효한가? 망국론에 대한 성찰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주 많은 이가 윤치호 일기를 오독한다. 제대로 읽어야 한다. 저 물음 말할 것도 없이 조선왕조 혹은 대한제국은 망할 만하니 망했다는 넉.. 2023. 6. 13. 소꿉친구가 내 영웅일 수는 없다 친구가 영웅 되는 법은 없다. 설혹 내가 모르는 거지가 내 보스가 될지언정 (2014. 6. 13) *** 예수도 제 고향에선 개차반 취급받은 이유다. 왜? 내가 너를 다 아는데 너가 영웅? 성자? 이는 단순한 시기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다. 너무 속속들이 아는 까닭에 그는 결코 나의 영웅이 될 수 없는 법이다. 내 영웅 혹은 내 추앙은 미지未知와 신비에서 배태한다. 그래서 차라리 나는 이름 모를 거지에서 내 영웅을 찾는다. 권위 디그너티는 저에서 비롯한다. 2023. 6. 13. 원시 후진 미개를 쓸어버리자, 조선 민족 갱생更生의 도道를 향한 몸부림 19세기말 20세기초. 동아시아는 때려부수기에 여념이 없었다. 서구의 압도적 힘에 놀란 이들은 그 원인을 찾아헤맸고 그 와중에 과학과 기술을 서광처럼 보았다. 그리하여 그들 내부를 향해 보니 그곳엔 각종 미신과 후진과 미개가 넘쳐났다. 구데기가 들끓는 내부는 청소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유신이라는 깃발 아래 미개 후진으로 지목된 잔재들이 휩쓸려 짓밟혔다. 메이지정부가 단행한 폐불훼석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한데 동아시아 중에서도 유독 이 틈바구니를 개독신이 짓밟은 데가 한반도였다. 동시대 중국에선 양계초가 미신 추방을 부르짓고 그 자리에 상무정신을 갖다놓더니 이후 의대 자퇴생인 노신이란 자가 나타나 중국을 서케가 들끓는 오지로 만들기 시작했으니 그의 붓끝에서 여지없이 전통 중국은 아큐요 광인 .. 2023. 6. 13. 갈수록 좋은 식물 광물 순전히 취미 수준이나 요새 갈수록 흥미를 돋구는 데가 식물과 광물이다. 이 둘을 견주자면 후자가 공부 환경이 녹록지 아니해서 광물을 제대로 배울 만한 데가 주변에 없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대전에 가 있는 지질자원연구원이나 국립중앙과학관처럼 수시로 들러 체계로 살필 광물 자료실이 있어야지만 유감스럽게도 서울에는 내가 만족할 만한 데가 없다. 저 광물은 내가 일찍이 관심을 기울여 나름대로는 파고 든다 했지만, 대체로 약물로 한정했으니 이건 도교 약물학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한다. 그런 경험이 썩 무용하지는 아니해서 예컨대 왜 신라사 화랑을 따르는 무리가 명산대천을 찾아다니고, 특히 동굴을 선호하는지 그 의문 일단을 풀 수도 있었으니 종유석이 약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된다. 반면 식물 쪽은 광물보.. 2023. 6. 13. AC 밀란 구단주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선입견인지는 모르겠지만, 특히 이탈리아 정치인은 모조리 부패를 달고 산다는 믿음이 강한데,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오늘 향년 86세로 화려찬란하고 시끌벅적한 생애를 끝내고는 저 세상으로 갔다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Silvio Berlusconi 같은 이 또 있을까 싶다. 1936년 9월 29일에 태어났으니, 파시즘이 한창 흥성하던 그 무렵에 출생 배경으로 삼는다. 그를 수식하는 말이 어디 한둘이랴? 거대 사업가 자본가로 미디어 타이쿤tycoon이면서 한 시대 이탈리아 정치를 주무른 정치 거물이고, 또 무엇보다 각종 부패 스캔들 단골 주인공이면서, 그 부패에는 모름지기 매춘부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 기억도 생생하다. 이태리 총리만 해도 1994~1995년, 2001~2006년, 그리고 2008~2011년까지 .. 2023. 6. 13. 조선인 지원병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조선인 지원병은 학병과 다르다. 학병은 전문학교 재학 이상의 사람들로 배울 만큼 배운, 조선땅에서는 당시 요즘으로 치면 흔하디 흔한 박사학위 소지자 보다 더 희귀한 사람들이었다. 당시 조선땅에 전문학교 이상 고학력자는 6000-7000명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람들이 바로 학병 대상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고학력 인텔리들이었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장교 재원으로 끌고간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 양반들 중 지원자가 있다 하여 친일 논쟁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내 생각에는 이 사람들은 장교 임관시켜 준다고 그 기회 잡겠다고 군대를 지원해 들어갈 그런 위치가 아니었다. 당시 전문학교 이상이란 정말 희귀하고 사회생활을 해도 소위 상당의 직급은 받아 생활 가능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학병은 거의 전.. 2023. 6. 12. 일본 육군 대본영의 1945년도 군령 일본육군 대본영이 1945년 2월 6일에 육군 전군에 발송한 통첩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어 아래 소개한다. 내용 중 읽어 볼 만한 부분에는 영어 번역을 따로 붙였다. 내선일체가 어쩌고, 조선인의 수준이 저열하고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있지만 다 생략하고 내용만 간단히 요약하면: 1. 조선인 지원병들이 자주 도망간다. 특히 학군으로 뽑은 조선인들이 불온하다. 자꾸 주변을 선동한다. 2. 조선인과 일본인 병사들 사이에 융화가 잘 안 된다. 3. 조선인 병사가 융화가 잘 안 되는 이유는 국어 (일본말) 이해하는 사람이 30프로가 안 된다. 지금 어쩔 수가 없으니 일단 국어를 가르쳐라. 여기서 알수 있는 건 당시 지원병과 학병에서 도망자가 많았다는 점. 일본인과 조선인 병사 사이에 융화가 잘 안되었다는 점. 그리고.. 2023. 6. 12. 학병 소위 임관은 합법적이었을까? 학병으로 끌려간 양반들이 예비사관으로 있다가 1945년 8월 경에 원래 정식 소위 임관하기로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이 시기 공통적 증언의 하나가,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했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9월 경에 일본군이 해산 하면서 소위 계급장을 주고 해산시켰다는 것인데-. 재미있는 것은 9月2日:日本政府が戦艦ミズーリで降伏文書調印。GHQ指令第一号(陸海軍解体、軍需生産の全面停止等)が出る。 라 해서 1945년 9월 2일 일본 정부가 미주리함에서 항복문서에 조인과 동시에 연합군최고사령부 (GHQ) 명령 제1호로 일본군 육해군 해체 명령이 하달되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보면 중국 방면 등지에서 일본군 해산과 함께 학병들에게 달아주었다는 소위 계급장이 합법적인 소위는 맞나 의심이 들 수밖에 없.. 2023. 6. 12. [전시가 만든 인연] (2) 옷소매 붉은 끝동 덕임과의 만남 교수님께 드린 말씀은 이것이었다. “교수님. 저희가 그 책을 주제로 작은 전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장하신 3~10권은 저희가 소장하고 있거든요. 가지고 계신 1~2권을 대여해주시면, 10권이 처음으로 한 데 모이는 것이 되어서 꼭 대여를 하고 싶습니다. 가능할까요? 그리고 그 책이 한글로 쓰인 소설 중, 필사자 이름이 정확한 최초의 소설이라고 하더라구요. 그 증거가 1권에 붙어 있어서, 1권은 꼭 전시에서 선보이고 싶습니다.” 그렇다. 이 책 가치는 소설 내용에만 있지 않았다. 곽씨와 장씨 가문 이야기라는 뜻인 ‘곽장양문록’은 3세대에 걸친 가문 이야기여서 그런지, 길기도 길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한 명이 필사하지 않고, 총 6명이 나누어 필사를 했다. 그것은 감사하게도, 1권 표지 안쪽에 .. 2023. 6. 12. [전시가 만든 인연] (1) "그렇게 중요해요? 그럼 기증하께요" 우연히 인연이 생기는 때가 있다. 그리고 사람과의 인연도 있지만, 유물에도 인연이 있다. 그때도 그런 때였다. 회의를 다녀온 과장님이 갑자기 나를 호출했다. “○○ 선생. 잠시 이야기 좀 하지.” “저요?” 나를 부를 만한 이유가 없는데, 나를 부르시니 눈이 동그래졌다. “○○ 선생이 지난 번에 갖고 왔던 그 책 있잖아. 관장님이 그걸 소개하는 전시를 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네.” 이런 것이 바로 내 발등에 도끼를 찍는다는 것이었다. 맞다. 그 책은 내가 스스로(!) 우리 전시관에 전시해 놓은 책이었다. 이전부터 그 책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그 책으로 전시를 하고 싶다고 생각은 했었다. 어느 유명 소설의 모티브가 된 그 책은, 직접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다. 트위터에 우리 박물관으로 검색하면 그 책이.. 2023. 6. 12. 일제시대의 지식인: [30] 현승종 현승종 선생은 학병 출신으로 해방 당시 일본군 소위 신분이었다. 귀국하여 고려대 교수, 성균관대 총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노태우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개천공립보통학교 (6년) -- 평양고보, 평양제이중 (1933-1938) -- 경성제대 예과 (문과을류) (1938-1941)-- 경성제대 본과 (1941년 3월-1943년 9월) 선생의 경력에서 경성제대 예과까지는 빈 해 없이 전개되다가 경성제대 본과 졸업을 6개월 당겨 1943. 9월에 하게 된다. 전쟁 말기에 대학과 전문학교 졸업이 6개월씩 당겨진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다. 위 기록에서 평양고보는 평양제이중과 같은 것이다. 3차 조선교육령이 발효되어 평양고보가 중학으로 바뀌면서 기존의 평양중을 피해 평양제2중이 되었다. 선생의 기록에서 흥미로운.. 2023. 6. 12. 초치招致 vs. 약견約見 비단 꼭 한국 중국 외교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저런 일은 빈번하게 국제관계에서 볼 수 있거니와, 외교관계가 성립한 쌍방 중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에다가 불만을 표기하는 전형의 방법이 저것이다. 이런 일은 보통 해당 국가 외교부가 나서기 마련인데, 그쪽이 외교관계를 관장하는 부처이기 때문이다. 부르는 상대는 그 나라에 주재하는 그 국가 공식 외교기관 대표자인데, 대표자가 없을 수도 있으니, 그때는 그에 준하는 다른 고위 외교관을 불러다가 니들 왜 그랬냐? 이래서는 안 된다 따지는 모습을 연출하기 마련이다. 보통 이럴 때 우리는 그 해당 외교관이 외교부 청사에 들어서는 모습을 공개하는 일이 많다. 그런 식으로 대외를 향해 우리가 이렇게 외교 관계를 일방으로 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대처하고 있다 뭐 이런 쇼를 .. 2023. 6. 12. 출구도 입구도 오직 하나뿐인 남영역 이런 데가 없지는 않겠지만 이 서울지하철 1호선 남영역은 들어가는 데랑 나오는 데가 오직 한 군데다. 그래서 아주 단순하다. 그 구내라 해 봐야 코딱지 만해서 남영역에서 만나자면 헷갈릴 여지도 없다. 그 인근 엎어지면 코 닿는 지점에 퍽 하고 윽했다는 박종철 고문치사실 남영동대공분실이 있다. 지금은 민주화 무슨 기념관으로 분한 시설이 있는데 운영주체가 어딘지 전연 존재감 제로다. 공사는 열심히 하더라. 저 얘기 나온 김에 내가 남영동 주민이나 저 대공분실 소재지는 남영동이 아니다. 2023. 6. 12. [宋] 소식蘇軾, 적벽 옛일을 회고하며[赤壁怀古] 大江東去,浪淘盡,千古風流人物。 出自於蘇軾的《염노교念奴娇·적벽회고赤壁怀古》 朝代:宋代 作者:소식蘇軾 큰 강 동쪽으로 흘러가며 물결이 그 옛날 영웅호걸 죄다 쓸어갔네 옛 누각 서쪽 성벽은 사람들이 이르기를 삼국시대 주유의 적벽이라 하네 울퉁불퉁 바위는 하늘 뚫고 놀란 물결은 벼랑 들이치며 천 갈래 눈꽃 말아올리네 강산은 그림 같고 한때 호걸은 얼마나 많았는지 멀리 주유 때 일 떠올리니 소교한테 막 장가들 무렵 영웅 같은 모습 피어 올랐네 깃 부채 들고 푸른 망건 걸친 채 담소하는 사이 군함들은 재 되어 날고 연기 되어 사라졌네 그 옛터 꿈처럼 노닐다 보니 다정도 병인 내가 우습구나 일찍 백발이 되고 말았으니 인생은 꿈만 같아 한 잔 들어 다시 강물 속 달님께 권하노라. 大江東去,浪淘盡,千古風流人物。 故壘西邊.. 2023. 6. 12. 몽블랑 정상에서 from 신정일 아름다운 경관을 만나면 매월당 김시습은 주저 앉아서 통곡을 했고, 화담 서경덕은 덩실 덩실 춤을 추었다는데 그 오랜 전통을 몽블랑산에서 유감없이 보여주었습니다. 많은 나라 사람들이 보는 그 순간에. 2023년 6월 10일 2023. 6. 11. 잡지 <개벽開闢>을 읽기 전에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이 제주 안에 있어도 어지간한 문헌은 컴퓨터 모니터로 찾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 감사한 일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직접 자료를 찾아보러 육지로 나가야만 하기도 합니다(꼭 필요한 자료인데 꼭 그거만 원문공개를 안해줘가지고...). 가려고 날을 잡아보는데 거 참 쉽지가 않네요. 어쨌건, 이제 정말 을 읽게 생겼습니다. 도대체 그 잡지가 어떤 잡지기에 내가 쓰려는 글(다시 말하지만 전 고려시대 전공자입니다)에 필요한 자료를 실었나 싶더군요. 이에 까페에 자리잡고 이 책을 폈습니다. 도대체 이란 무엇인가? 2023. 6. 11. 고대 이집트의 희귀 귀금속 - 은 by 유성환 오늘은 제 페친 중 한 분이신 김태식 님께서 최근 포스팅하신 “고대 이집트엔 은 광산이 없나?”라는 질문을 받고 몇 자 적어보려고 합니다(아래 관련 링크 참조).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없다”입니다. ㅎㅎ 관련 링크: 이집트엔 은이 없어 에게해서 수입? 이집트엔 은이 없어 에게해서 수입?어찌하여 이 소식이 호주 시드니발인지는 모르겠으나, ABC News Australia 보도에 의하면, 고대 이집트 왕비 헤테페레스 Hetepheres 무덤에서 1920년대 발굴된 팔찌들에 쓴 은은 그리스 에게해 섬 수입산historylibrary.net 고대 이집트는 고대 서아시아 전역에서 금의 산지로 유명했지만 은을 채굴할 수 있는 광산은 거의 전무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 남부와 누비아(Nubia) 지역에서는 금과 은의.. 2023. 6. 11. 경성제국대학 개교를 축하합니다~축하합니다~(뿌우) 1924년 5월 2일, 칙령 103호로 가 반포 시행되며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이 개교했다. 1924년 5월 9일 경성제국대학 예과豫科 제1회 신입생 선서식이 거행되고, 이튿날 경성제국대학 예과 제1회 입학식이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다음날인 12일 최초의 수업 시작, 곧 개강開講이 있었다. 그 다음날인 13일, 서울의 일본인 신문 에서는 1면의 거의 2/3을 할애해 경성제국대학 개설을 축하하는 광고를 실었다. 그런데 그 광고들을 보아하니 이들이 왜 대학 개설을 축하했는지 짐작이 간다. 남산 자락 혼마찌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서점은 "우와! 대학이 생겼으니 이제 대학 교재 수요가 생기렸다. 그리고 소설 같은 것도 좀 팔리겠지, 기왕이면 우리 가게에서 사가게 하자"겠고, 구두 가게와 모자 가게야 "크으!.. 2023. 6. 11. 일제시대의 지식인: [28] 김계원과 [29] 김영환 학병 출신에 대해서도 언젠가 자세히 써야 할 것이다. 해방 후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김계원과 공군 준장으로 순직한 김영환 양 장군은 두 사람 모두 학병 출신이다. 학병출신이라는 이름을 생소하지 않지만 이것처럼 오해가 많은 부분도 없다. 오해가 많으니 개인에 대한 평가도 들쭉날쭉이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학병인데 항일운동급으로 추앙되고 어떤 사람은 똑같은 학병인데 친일파 급으로 매도되기도 한다. 보는 사람의 개인적 호불호가 평가에 개입한 탓이다. 학병은 그 자체는 70년대 강제징집이나 80년대 전방입소 등과 다를바가 없다. 원해서 간 것은 당연히 아닌데 학병이 도대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끌려간것인지 온라인 상에는 제대로 정리된 글 하나 보이지 않는다. 주장만 난무할 뿐이다. 제대로 된 팩트의 확인부터 필.. 2023. 6. 11. 이집트엔 은이 없어 에게해서 수입? 어찌하여 이 소식이 호주 시드니발인지는 모르겠으나, ABC News Australia 보도에 의하면, 고대 이집트 왕비 헤테페레스 Hetepheres 무덤에서 1920년대 발굴된 팔찌들에 쓴 은은 그리스 에게해 섬 수입산임을 보여주는 분석 결과가 나왔댄다. 이 왕비는 파라오 스네퍼루 Sneferu 와 혼인하고 기자 대피라미드 건설자인 쿠푸 Khufu 어머니로, 기원전 2589~2566 무렵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Macquarie University Karin Sowada가 말하기를 이집트에서는 local sources of silver가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런 은은 이전에는 은 함유 비율이 높은 local gold sources 에서 추출한 것으로 간주했단다. 한데 이번 팔찌 분석 결과 그 은의.. 2023. 6. 11. 장미와 대나무 라니 별 희한한 조합도 다 있다 싶지만, 그림으로 옮겨놓으니 제법 아취가 그럴싸하다. 계유년, 곧 1933년 어느 봄날 무호無號 이한복李漢福(1897-1944)의 붓끝이 이 둘을 만나게 하였다. 채색이 들어갔다고 무조건 화려한 그림이 되지도 않고 먹만 썼다고 무조건 담담한 그림이 되지도 않는다. 채색을 써도 얼마든지 이처럼 맑고 담담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법이다. 시대가 시대였으니만큼 일본의 영향을 짙게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무호라는 작가 자신의 역량이 받쳐주지 못하였던들 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 Editor's Note *** 저 이한복은 호를 호가 없다 해서 無號라 쓴 대목이 이채롭다. 그런 까닭에 무호는 자호自號일 것으로 본다. 덧붙여 전통 수묵화로 그렸을 법한 데다가 채색을 씌우고 더.. 2023. 6. 11. 이전 1 ··· 404 405 406 407 408 409 410 ··· 949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