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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를 일으켜 공포를 유발하는 거란군 앞서 거란군 전법 중에 어린이나 노약자를 총알받이로 내세우는 이야기를 했거니와, 그 이야기가 수록된 요사遼史 권34 지志 제3 병위지兵衛志 상上을 보면 그에 이어 오늘 방영한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31화에서 보인 먼지 일으키기 전법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또 타초곡打草穀 집안 장정[家下]들을 시켜 말에다가 두 빗자루를 매어 바람을 이용해 재빨리 달리게 해서 적진에 먼지를 일으키며 번갈아 오가게 한다. 그리하여 적군이 주리고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승리를 거둔다. 먄악 진영 남쪽이 승리하고 진영 북쪽이 패했지만 주장主將이 진중에 있으면서 알지 못하면 본국의 사방 산천 이름을 부르면서 소리쳐 부름으로써 그에 응하여 서로를 구원한다. 又令打草穀家下馬施變雙帚,因風疾她,揚塵敵陣,更互往來。中既饑疲,目不相視,.. 2024. 3. 9.
전투에 앞서 말꼬리 묶어 천지신명에 기도한 거란군 방금 끝난 고려거란전쟁 31화인가를 보면 귀주 벌판에서 거란군과 한 판 붙기 전에 거란군이 행하는 의식 중에 말꼬리를 끈으로 묶고 천지신명한테 기도하면서 검은 염소 한 마리를 희생으로 삼는 장면이 있거니와, 이게 나름으로 근거가 있다. 요사遼史 권50 지志 제20 예지禮志 삼군의三軍儀 예지禮志4를 보면 황제친정의皇帝親征儀라 해서 황제가 직접 전쟁에 출전해 전투를 행할 무렵에 행하는 의식이 소개됐거니와, 개중 한 구절에 이런 표현이 있다. 장차 적군을 접촉하기 전에 말꼬리를 묶어 하늘과 땅에다가 기도하며 배례한 다음에 적진으로 달려든다. 성을 함락하고 적군을 무찌른 뒤에에도 하늘과 땅에 제사하는데 흰 양과 검은 양을 희생으로 쓴다. 將臨敵,結馬尾,祈拜天地而後入。下城克敵,祭天地,牲以白黑羊。 이것 말고 반사班.. 2024. 3. 9.
고대 메소포타미아 푸아비 여왕이 걸친 인더스 보석 장식품 아이러니한 사실은 인더스의 장인정신과 예술성의 가장 놀라운 사례 중 하나가 모헨조다로 Mohenjo-daro 나 하라파Harappa, 심지어는 아대륙 subcontinent 이 아니라 고대 메소포타미아 ancient Mesopotamia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이 장식품은 기원전 2500년쯤에 조립되었다는 대략적인 날짜도 있다. 그리고 누구를 위해 만들었는지도. 우르 시 city of Ur 푸아비 여왕 Queen Puabi이다. 그녀가 죽었을 때, 그 수의는 너무 많은 홍옥수 carnelian, 청금석 lapis , 금, 마노 agate 로 만들어졌기에 그 당시 보는 사람들이 그래야 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숨이 막힐 정도다. 그것이 발견되고 나서, 10년 전 투탕카멘 무덤에서 발견된 것과 비교 검토.. 2024. 3. 9.
머리가 큰 조선군을 조심해라 어느 정도 잘 알려진 사실인데, 조선 후기 나선정벌 때 조선군이 러시아인들을 격퇴한 적이 있는데 이때 러시아인들 사이에서는 조선군을 가리켜 "머리 큰 놈들을 조심해라"라고 했다는 믿거나 말거나의 말이 있다. 그런데 한국인이라고 특별히 머리가 클까? 그것보다 한국인이 머리가 크다고 느끼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한국인은 머리가 양쪽으로 넓고 앞뒤로 짧아서 전면에서 볼 때 다른 인종보다 머리가 커 보인다. 둘째는 한국인들이 미국인 헬맷을 쓸 때 머리 폭이 좌우로 짧은 헬맷을 쓰기 때문에 꽉끼는것처럼 느낀다는 말이다. 따라서 왜 나는 헬멧이 머리에 꽉 끼지, 하고 좌절하게 된다. 한국인이 머리가 큰가 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사실을 보자면 이 경우에도 좌우로 꽉 끼는 대신에 앞뒤는 헐렁.. 2024. 3. 9.
이정후의 헬멧과 한국인의 머리 최근 미국으로 진출한 이정후의 헬멧이 자꾸 벗겨진다는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는데, 왜 이렇게 되는가? 이유는 이렇다. 한국인의 머리 두상은 단두, 광안, 고두다. 무슨 말이냐 하면, 머리의 앞뒤 길이가 짧고 얼굴이 넓고 머리 높이가 높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머리 모양이 바둑돌 모양인데 이마의 높이가 높다는 뜻이고, 이 때문에 한국인들은 서구인들의 헬멧을 쓰면 잘 안맞는다. 한국군이 미군 화이바를 쓰면 눈썹을 가릴 수가 없다. 이마의 높이가 높기 때문이다. 때문에 미군의 헬멧을 쓸 때 한국인의 얼굴 폭에 맞게 헬멧을 고르면 앞뒤가 너무 길고 게다가 헬멧이 머리 위에 높게 걸려 눈썹이 드러나고 헬멧이 머리 위에서 뱅글 뱅글 돌게 된다. 이 때문에 한국군의 헬멧은 전부 한국인의 표준치에 맞게 디자인된 것으로 .. 2024. 3. 9.
평양을 능가하는 청천강변 대도회 안주 앞서 자비 유배 출전인 황자黃梓(1689)~?)의 1734년 진주사행陳奏使行 기행록인 갑인연행록甲寅燕行錄을 보면 오가는 길목에 안주安州 라는 데를 모름지기 지나기 마련이라, 이곳은 청천강변이라, 나루가 모름지기 있기 마련이며, 나아가 바다에서 거리가 얼마되지 아니하는 까닭에 배가 들어왔을 곳이다. 이런 데 도시가 형성되기 마련이어니와, 고려거란전쟁에서도 중요한 무대로 등장하는 곳이기도 하다. 고려는 거란과 압록강을 경계로 설정하기는 했지만, 일단 그것이 뚫리면 1차 방어선이 청천강이라, 이 청천강을 지켜야 서경을 보호하게 된다. 고려시대 안주가 어떤 면모였는지 증언이 많지 않아 아쉽기 짝이 없거니와, 그로부터서 훨씬 시대를 내려와 조선시대 증언을 보면 그곳이 점거하는 위치를 가늠케 하는 대목이 적지 않으.. 2024. 3. 9.
[마질차] (5) 신목태후의 등장, 싹트는 반란의 씨앗 이에 앞서 소명태자昭明太子가 무열제武烈帝의 명으로 흠운欽運의 딸을 아내로 맞기로 약속했으나 일찍 죽으니 흠운의 딸은 스스로 소명제주昭明祭主가 되고자 하니 자의후慈儀后가 허락하니 이가 곧 소명궁昭明宮이다. (정명政明) 태자와 더불어 모후母后가 자주 소명궁으로 거둥하니 태자가 소명궁을 좋아하여 마침내 이공전군理恭殿君을 낳았다. (이에) 후后가 소명궁에게 명하여 동궁東宮으로 들어가게 하고 선명궁善明宮으로 이름을 바꾸니 총애함이 흠돌의 딸보다 크기 흠돌의 딸이 투기를 했다. 화랑세기 제32세 풍월주 신공信功 전에 보이는 이 구절이야말로 곧이어 펼쳐질 일대 피비린내나는 내전을 예고하는 암시다. 당시 왕실 권력구도를 보면 이미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죽고 없는 가운데 가장 큰 어른으로 그의 정비이면서 김유신과 김흠순 .. 2024. 3. 9.
한식에서의 국물 우리는 한식에는 국물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밥과 국은 세트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밥과 국이 한 세트를 이루는 이러한 조합은 쌀밥 시절에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쌀밥을 주로 먹는 문명권은 한국이나 일본 말고도 많다. 그런데 국을 매끼니마다 겉들이는 건 한국, 일본 말고는 없다. 인도는 밥을 국물에 비벼 먹기도 하는데 우리처럼 국을 그릇에 퍼서 먹지는 않고 우리로 친다면 찌개 정도의 점도를 가진 찬 국물에 밥을 비벼 먹는다. 필자가 모든 쌀 문화권을 다 보지를 못해서 자신은 없다만, 쌀밥에는 국이 필수가 아니다. 필자가 보기엔 한식에 국물이 세트로 붙게 된 것은 쌀밥 먹던 시절의 유습이 아니라, 잡곡을 주로 먹던 시절의 유습이다. 잡곡을 쪄서 먹던 시절에는 국물 없이는 절대로 밥 못먹는다... 2024. 3. 9.
암울이 겹치는 중대 신라왕실, 유성은 삼대성을 침범하고 천구성은 곤방으로 곤두박칠하다 삼국사기 문무왕본기下를 보면 그 말년에 두 가지 이상 천문 징후가 있으니, 그가 죽기 직전 재위 21년 5월에는 유성流星이 삼대성參大星이라는 별자를 침범한 일이 있는가 하면 그 다음달에는 천구天狗라는 별이 곤방坤方에 떨어지는 일이 있었다 한다. 이런 천문 이변은 뭐 복잡하게 따질 것 없이, 보통 왕과 그에 준하는 중요한 인물이 곧 죽거나 혹은 왕조 자체가 멸망할 때 그것을 암시하는 전형의 예고편이라 이 경우는 더 간단해서 문무왕 김법민이 7월 1일 죽을 것임을 암시하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왜? 저와 같은 일은 보통이면 일어나서는 안 되지만 일어났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상례의 파괴로 해석된 까닭이다. 한데 문제는 저 두 가지 사건이 모조리 문무왕 죽음을 암시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저 둘을 각.. 2024. 3. 9.
[독설고고학] 보존과학은 보조도구가 아니다 첫째 고고학을 비롯한 이른바 문화재학이 바라보는 보존과학이 문제이며둘째 보존과학 스스로의 문제 또한 심각하다.일언이폐지한다.보존과학은 문화재학 보조도구가 아니다. 주체다.어느 정도로 주체인가?고고학을 포함하는 문화재학 전반을 호령하는 절대의 학문이다.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보조도구로 연명할 뿐이다.누가 이거 뭘로 만든 건지 분석해 달래면 분석해 던져주고 이거 원산지 어딘지 추정해달래면 추정해주고 연대측정해 달래면 연대측정해주고 고쳐달라면 고쳐주고 떼워달래면 떼워주는 일을 본령으로 삼으니 이러고도 무슨 주체가 된단 말인가?언제나 따라지일 뿐이다.그래 그런 생활이 편한 것도 있다. 그걸로 크게 욕먹을 일도 없고 시키는 일만 하면 되니깐 말이다.주체로 서기 위해서는 보존과학이라는 말부터 쓸어버려야 한다.왜 과.. 2024. 3. 8.
식어버린 청동기시대 기장밥은 어떻게 먹는가 청동기시대 찐 기장밥을 한 번 더 만들었다. 아무리 먹을거리가 부족한 청동기시대라 해도 기장밥 같은 잡곡밥도 한끼 식사 끝나고 남지 않았을 리 없다. 남았을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되었을까? 한번 알아보자. 기장밥 찐것을 반나절만 놔 두면 마치 모래알처럼 바뀐다. 찰기가 있는 찰기장인데도 그렇다. 청동기시대도 이랬을 것이다. 이건 어떻게 먹었을까? 그냥 먹어봤다. 사람이 먹을 게 못된다. 다시 찌면 나아질 것 같은데 다시 쪘을까? 이건 분명히 국물을 썼을 것이라 생각하고 국물을 만들어 먹어보았다. 이거다. 청동기시대 잡곡 찐밥은 한번 식으면 절대로 그냥은 못먹는다. 반드시 국물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냥 바로 한 밥 보다도 더 낫다. 이상 청동기시대 기장 찐밥, 식은 밥을 먹는 방법에 대한 실.. 2024. 3. 8.
남들 다 해먹고 박물관장 막차 탄 최순우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는 같은 개성 출신으로 같은 우현 고유섭을 사사했다 하지만, 나란히 1918년생인 황수영 진홍섭보다 두 살이 많다. 더구나 황과 진 두 사람이 비교적 일찍 학계 교수로 튄 것과는 달리 끝까지 박물관을 지켰으니, 태평양전쟁 말기 박물관에 발을 디딘 이래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가 국립중앙박물관장직을 퇴사한 시점이 1984년 12월 1일이요, 그가 사망한 시점은 그보다 보름 뒤인 같은달 16일이다. 사임 시점 문공부 장관 이진희랑 한 판 붙었다는데, 그 충격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저 3인방 중 진홍섭은 국립박물관 산하 경주박물관장(실은 분관장)을 하다가 1963년에 이화여대로 튀었다. 학계에는 비교적 늦게 진출했다. 최순우 이력을 보면 1943년 고유섭이 관장.. 2024. 3. 8.
메주 만드는 데도 식민지배 논리가 관철한다는 한국근대사 식민지대를 주축으로 삼는 한국근현대사는 강박 하나가 거대한 유령으로 배회하며 역사를 난도질하니 일본놈과 그에 부화뇌동한 놈은 극악무도해야 한다는 윽박이 그것이라 언제나 저 시대 기술은 일본놈 나쁜놈으로 출발해서 언제나 일본놈 나쁜 놈으로 끝난다. 허심하게 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까지 언제나 이르기를 강포한 일본놈이 한민족 정기를 말살하고자 한 짓거리라 하고 콩으로 메주를 쑤었다 해도 그 콩에도 그 메주에도 그것을 재배하고 만들고 유포하는 일에도 일제의 식민지배 논리가 강고하게 작동한다는 것이 작금 한국 역사학이다. 거지 행려병자 구제사업도 천황의 은사금이 있으니 일제의 식민지배 논리가 관철한다 하고 천둥벌거숭이 산을 녹화하는 일도 수탈을 위한 고도의 포석이라 하며 식량증산 계획도 오로지 수탈이라는 .. 2024. 3. 8.
사설학원 열어 연명하는 조선시대 유배 생활 황자黃梓(1689)~?) 1734년 진주사행陳奏使行이라는 대청 사신단에서 서장관 자격으로 북경을 간다. 이때 정사正使가 서명균徐命均, 부사副使가 박문수朴文秀였다. 갑인연행록甲寅燕行錄은 이 사행길에서 그가 보고 들은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 청淸 옹정제雍正帝 12년, 조선 영조 10년 갑인년이라 해서 이리 이름하고 그의 문집 필의재유고畢依齋遺稿에 수록됐다. 7월 2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잘 다녀오겠다고 영조를 배알하고 출발한 삼사三使는 이후에는 각자 도생이라 만났다가 헤어지고 각자 개인일도 보고 하는 요새 같으면 있을 수 없는 행태를 보이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사행길 일반 패턴이었다. 삼사가 붙어다니면 쌈박질밖에 더 하겠는가? 암튼 서장관 역시 넘버3이기는 했지만, 고위공무원단이라 전용 차가 배정되었으니, 그.. 2024. 3. 8.
조선시대는 고려시대보다 반드시 뭔가 달라야 한다는 강박관념 고려에서 조선시대 사이의 획기는 단지 왕조가 교체되었을 뿐 아니라 반드시 두시대 사이는 뭔가 다르게 설정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으니 이는 바로 "역사는 발전한다"는 테제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역사는 발전한다, 그건 좋은데 일본을 보면 도저히 하나로 묶기 어려울 것 같은 헤이케 정권에서 에도막부까지를 묶어 무가정권이라 부른다. 필자가 보기엔 우리나라 고려왕조와 조선후기까지의 사회의 질적 차이는 헤이케 정권에서 에도막부사이의 차이보다도 더 적다. 헤이케 정권과 에도막부는 고려왕조와 조선후기까지의 차이와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사회인데도, 이를 무가정권이라 하나로 묶고, 굳이 에도시대를 따로 쓰고 싶다면 여기서 근세를 따로 둔다는 말이다. 고려시대를 귀족사회, 조선시대를 사대부사회. 억지다. 고려시대의 잘나.. 2024. 3. 8.
[마질차] (4) 형수가 되었을 여인을 노리는 시동생 그때 태손太孫 소명전군昭明殿君이 이미 태어난 상태였고, 무열제는 (며느리인) 자의慈儀의 현숙함을 매우 아꼈다. (27세 흠돌欽突 전) 그때란 26세 풍월주인 진공이 흠돌한테 풍월주 자리를 물려준 때다. 이때가 656년 태종무열왕 재위 3년째다. 따라서 이로 보면 문무왕 김법민과 그의 정비 자의 사이의 맏이인 소명태자는 656년 혹은 그 직전에 태어났다. 소명을 전군이라 부르는 까닭은 아직 정식 왕자 혹은 태손으로 임명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전군은 정식 왕자보다는 한 등급 낮은 왕의 아들을 지칭하는 호칭이다. 이 두 가지 증언과 삼국사기 김흠운 열전을 종합할 때, 여기서 일어나는 일대 의문이 있다. 앞서 보았듯이 김흠운은 655년 백제와의 조천성 전투에 출전했다가 장렬히 전사했고, 그때 관위가 어느 정도.. 2024. 3. 8.
골동상이 가져와 구입한 이화여대박물관 소장 국보 청자 1946년 4월 1일, 인천시립박물관 개관과 더불어 만 27세에 그 초대 관장으로 복무한 이경성은 1954년 3월 31일, 36세에 그곳을 사임하고서는 활동 무대를 인천에서 서울로 옮긴다. 그 자신의 이력서에는 이 무렵 홍익대 연세대 한양대 서바벌예대, 수도여사대, 덕성여대를 전전한 보따리 강사 시절로 묘사하거니와, 이로 보아 무슨 뚜렷한 대안이 있어 관장직을 사임한 것만은 아닌 듯하다. 왜 사임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가 회고록에는 거의 드러나지 아니하는데, 외압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심증을 강하게 준다. 이러한 세월 속에서 인천이 고향인 나는 여러 가지 일을 벌일 수 있었는데 서울에 있던 친구들이 그만큼 인천을 위해 봉사하였으면 되었지 그만 올라와서 전국적인 바탕에서 일을하고 미술 평론가로서의 길을 .. 2024. 3. 8.
고려와 조선시대는 질적으로 동일한 사회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는 시대 구분을 하면 안 되는 시기다. 두 시대 모두 사대부사회다. 고려시대가 귀족사회가 아니라는 말이다. 두 시대 모두 과거제에 기반한 사대부 사회로 북송 이후 중국의 사대부사회에 정확히 대응하며, 일본의 경우 헤이케 정권 이후 무가정권에 대응하는 단계다. 일본에서 무가정권을 헤이케-가마쿠라-남북조(무로마치)-전국시대-도쿠가와 시대로 나누듯이 그렇게 우리도 장구한 고려시대 이후의 기간을 사대부사회 하나로 묶고 그 안에서 시대를 다시 나눠야 한다. 고려시대가 조선시대와 정말 그렇게 질적으로 다른 사회였는지 곰곰히 생각해 볼때가 됐다. 2024. 3. 8.
미술사가 석남石南 이경성李慶成(1919~2009)의 학적 편력 대한민국 제1호 공립박물관인 인천시립박물관 초대관장이며 이화여대 교수와 홍익대 교수를 거쳐 훗날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하는 그의 회고록 겸 수필집인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시공사, 1998, 2 초판1쇄) 에서 저자 스스로가 밝힌 이력을 정리한다. 다만 이 이력이 백퍼 팩트라고는 확신할 수는 없다. 기억 착란이 있을 수 있고 분식 또한 없다 장담해서도 안 된다. 함에도 식민지시대, 특히 그 중기에 태어나 태평양전쟁기 무렵에 대학생활을 보낸 인텔리겐차 전형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의 이력은 주시해야 한다. 이에 의하면 그는 1919년 2월 17일(음력인지 양력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아버지 이학순과 어머니 진보배의 장남으로 인천 화평동 37번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본래 유성에서 터전을 삼았다. 그러다가.. 2024. 3. 7.
오노다시멘트 사장 안도 도요로쿠와 남만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 그리고 안중근 삼일운동이 일어난 1919년. 그해 12월, 한국 최초의 시멘트 공장인 오노다시멘트 조선 공장이 평양 외곽 강동군 승호리(한국 공군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의 그 승호리가 맞다)에 설립되자, 조선에는 승호리에서 생산된 현대식 포틀랜드 시멘트를 활용해 콘크리트 건물이 평양에서부터 급속하게 늘어났다. 뒤이어 함경도 문천과 1937년 강원도 삼척에 오노다시멘트 삼척 공장이 연이어 문을 열어 식민지에서 시멘트 생산을 담당한다. (동양그룹의 모태인 동양시멘트가 해방 이후 적산이 된 삼척공장을 인수해 성장한 것으로 오노다시멘트는 아직도 일본 최대의 시멘트 기업이다.) 초점은 시멘트가 아니고 당시 오노다시멘트의 중역(전무)으로서 조선 내 시멘트 생산을 책임진 인물로 훗날 사장까지 역임하는 안.. 2024. 3. 7.
[마질차] (3) 청상과부 싱글맘이 된 김춘추의 딸 앞서 우리는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 김경신金敬信(재위 785~798) 선대 계보를 추적하면서 그 5대조가 마질차摩叱次 혹은 마차摩次임을 보면서, 그런 마질차가 조선시대에 발간된 경주김씨계 족보에서는 655년, 신라 태종무열왕 2년 조천성助川城 전투에 낭당대감郎幢大監으로 출전해 백제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김흠운金欽運의 아들로 등장함을 보았다. 조선시대 족보는 그 역사성을 의심하는 시각이 적지 않거니와, 무엇보다 그에서 보이는 계보들이 추리면 첫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토대로 삼아 후대에 만든 듯하거나 그에서는 보이지 않는 대목들이 보이는 까닭이라, 간단히 말해 선대 기록을 토대로 억지로 그런 계보를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작동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경주김씨와 그 분파에서 나타는 신라시대 .. 2024.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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