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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us Livius (Livy), The History of Rome, 리비우스 로마사 책 전체에 대한 영어번역은 아래 참조 http://www.perseus.tufts.edu/hopper/text?doc=Perseus%3Atext%3A1999.02.0026 http://mcadams.posc.mu.edu/txt/ah/Livy/ 티투스 리비우스(Titus Livius)는 고대 로마 역사가다. 라틴 이름이 Titus Livius이며, 영어로는 Livy로 표기하는 일이 압도적으로 많다. 기원전 59년 혹은 64년 파타비움Patavium 출생이니, 이곳은 베네치아(Venetia), 현재의 이탈리아 파두아Padua다. 서기 17년 고향에서 죽었다. 가이유스 살루티우스 크리푸스(Gaius Sallustius Crispus, 혹은 살루스트Sallust), 그리고 타키투스Tacitus와 더불어 고대 로.. 2018. 3. 10.
《원화군현도지》(元和郡縣圖志) 약칭 《원화군현지》(元和郡縣志)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완비된 전국 지방지리 총서로서 전 40권이다. 체례가 완비됐으며, 전국을 커버하니 100도(道) 47진(鎭)을 강(綱)으로 삼고, 부(府)·주(州)·현(縣)을 목(目)으로 삼았다. 각 지방 행정구역별로 그 연혁을 기술하되, 위로는 삼대(三代)로 소급하며, 아래로는 이 책이 편찬된 당대(唐代) 원화(元和) 연간에 이른다. 편찬 책임자는 이길보(李吉甫, 758~814)이니, 字를 홍헌(弘憲)이라 하며 조주(趙州) 찬황(贊皇) 사람이다. 어사대부(御史大夫) 이서균(李棲筠)의 아들인데, 음보(廕補, 음서)로 좌사어솔부창조참군(左司御率府倉曹參軍)이 되었다. 정원(貞元) 연간 초에 태상박사(太常博士)가 되고 관직이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 2018. 3. 9.
《괄지지(括地志)》 애초 전 550권이며 서략(序略) 5권이 더 있었다. 당초(唐初)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의 넷째 아들로 위왕(魏王)에 책봉된 이태(李泰)가 주편한 거질 지리서(地理書)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와 고야왕(顧野王)의 《여지지(與地志)》의 양대 先代 지리서를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형태의 지리서 체례를 열었다고 평가되며 여기에서 이룩한 지리서 편찬 전통은 후대의 《원화군현지(元和郡縣志)》와 《태평환우기(太平圜宇記)》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미 남송(南宋)대에 이르러 그 원전은 망실되어 버리고 그 잔편(殘篇)들만이 후대 다른 서적들에 산발적으로 인용되어 전할 뿐이다. 편찬 책임자 이태는 “好士愛文學”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아버지 태종 또한 그를 총애해 그에게 문학관(文學館)을 세우도록 허락했다. 이에 .. 2018. 3. 9.
《삼보황도(三輔黃圖)》 6권 원저자는 불상이며 성립 연대 또한 알 수 없으나 東漢 末 이전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三國시대 魏人인 여순如淳의 《한서주漢書注》에 이미 인용되기 때문이다. 《수서 경적지(隋書經籍志)》에서 처음으로 존재를 드러내니 이때는 一卷本 《三輔黃圖》이었다. 그 뒤 南宋 조공무晁公武의 《독서지讀書志》에서 이를 三卷으로 바꾸기 시작했으며 진진손陳振孫의 《직재서록해재直齋書錄題解》에서는 兩卷이라 했다. 《四庫全書總目》은 여수겸勵守謙이 收藏한 六卷本을 저록하면서 佳本으로 간주했다. 육권본은 漢代 三輔 지역의 古跡을 主로 삼으니 특히 長安을 가장 충실이 기술했다. 그 외에 秦漢 시대 三輔 지역의 風俗도 덧붙였다.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에서는 이 책을 가리켜 “이에서 기록한 궁전과 원유의 제도는 조목별로 잘 분류해서.. 2018. 3. 9.
《續資治通鑑長編속자치통감장편》980卷, 南宋 李燾(1115?~1184) 撰 전문검색은 다음으로 들어가라 http://cls.admin.yzu.edu.tw/Tong/search_main.htm 도합 980卷이며 南宋 이도(李燾, 1115~1184) 撰이다. 宋 太祖 조광윤(趙匡胤) 건륭(建隆. 960)에서 시작해 宋 欽宗 趙桓 靖康(1127年)에 이르기까지 北宋 九朝 168年 역사다. 李燾는 正史와 實錄과 政書에서 채록하고 “旁採異聞, 補實錄, 正史之闕略;參求眞是, 破巧說․僞辨之紛紜”하여 體例는 司馬光 《資治通鑒》을 모방하니 근본을 “寧失於繁, 無失於略”하는 原則에 두었으니 記載에 不同한 곳이 있으며 兩存 是說했다. 周密의 《계신잡지(癸辛雜識)》에 의거할 때 李燾는 재료 수집 시에 “作木廚十枚, 每廚作抽替匣二十枚, 每替以甲子誌之. 凡本年之事, 有所聞, 必歸此匣, 分月日先後次第之,.. 2018. 3. 9.
《태평어람(太平御覽)》 太平御覽 一千卷 宋 李昉 等 編纂 http://www.guoxue.com/wenxian/leishu/0001.htm 北宋시대 전기에 국가에서 편찬한 ‘四大書’ 중의 하나이다. 《四庫全書總目提要》에서 이르기를 “宋李昉等奉敎撰. 以太平興國二年受詔, 至八年書成. 初名《太平類編》, 後改名爲《太平御覽》. 宋敏求《春明退朝錄》謂書成之後, 太宗日覽三卷, 一歲而讀周, 故賜是名也.”(송나라 이방 등이 교서를 받들어 편찬했다. 태평흥국 2년에 조칙을 받들어 8년에 책이 완성됐다. 처음에는 태평류편이라 했다가 나중에 개명하여 태평어람이라 했다. 송민구는 춘명퇴조록에서 이르기를 책이 완성되 다음에 태종이 날마다 3권씩 보다가 1년만에 독파했으니, 이런 인연으로 이런 이름을 내렸다)라고 했다. 전체를 50개 門으로 나누었으며, .. 2018. 3. 9.
극락(極樂) 산스크리트 原語는 “樂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로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이 住하는 世界를 가리킨다. ‘극락세계(極樂世界)’ ‘극락국토(極樂國土)’라고도 한다. 漢譯 佛典에서는 ‘수마제’(須摩題) ‘수가마제’(須呵摩提) 등이라고 음사(音寫)하며, ‘안락(安樂)’‘안양(安養)’이라고 의역되기도 한다. 수도권 도시 안양은 그 이름이 바로 이에서 유래한다. 漢語인 ‘極樂’은 중국고전에서는 매승(枚乘)의 ‘상서간오왕’(上書諫吳王‘(《文選》39) 등지에 보이는데, 그 의미는 “더 이상 없는 즐거움”이다. 또 반고(班固)의 서경부(西都賦) 등지에도 보이는데 “즐거움을 다한다”는 의미이며, 나아가 《회남자(淮南子)》 원도훈(原道訓)에는 “至極의 樂”이라는 말이 나온다. 불전에서는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아미타경(阿.. 2018. 3. 9.
왕흠약(王欽若) 왕흠약(王欽若. 962~1025)은 자(字)가 정국(定國)이며 북송(北宋) 신유(新喩) 출신이다. 신유는 지금의 新餘東門王家 자리다. 18세에 《평진부론(平晉賦論)》을 지어 문명을 떨쳤고, 북송 태종(太宗) 순화(淳化) 3년(992)에 실시된 순화 진사 갑과(淳化 進士 甲科)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했다. 이후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거쳐 재상인 동평장사(同平章事)에까지 관직이 이르렀다. 경덕(景德) 원년(1004) 거란(契丹)이 내범(來犯)하자, 당시 북송 황제 진종(眞宗)은 적을 두려워하여 왕흠약과 진요수(陳堯수) 등의 大臣들이 내놓은 계책을 받아들여 남조(南逃)로 천도하려 했으나 당시 재상(宰相) 구준(寇準. 961~1023)이 힘써 중의(衆議. 여론)를 배척하여 진종에게 단주(.. 2018. 3. 9.
《전당시(全唐詩)》 Quantangshi http://www.guoxue.com/zibu/dao/yun7/yun7.htmhttp://www.xysa.com/quantangshi/t-index.htm 《전당시(全唐詩)》 Quantangshi淸 康熙 44년(1705), 팽정구(彭定求)․심삼증(沈三曾)․왕사굉(汪士紘)․왕역(汪繹)․유회(兪梅) 등 10인이 봉칙편교(奉勅編校)하여 “시 4만8천900여 수, 2천200여인을 얻어(得詩四萬八千九百餘首, 凡二千二百餘人)”니 도합 900卷에 목록만 12卷에 달하는 초 거질 당대(唐代) 시가집이다. 조설근(曹雪芹)의 祖父인 조인(曹寅)이 奉旨하여 刊刻 《全唐詩》했다. 全書는 明代 호진형(胡震亨)의 《당음계참(唐音統籤)》과 淸代 이진의(季振宜)의 《당시(唐詩)》가 이룩한 성과를 바탕으로 하면서 잔비殘碑․단갈斷碣․.. 2018. 3. 9.
《광동통지(廣東通志)》 明淸 兩代의 地方誌로서 廣東省 內의 事蹟․氣候․風俗․水利․人物․藝術文化 等等을 정리, 기록했다. 《廣東通志》는 明代의 《광동통지초고廣東通志初稿》에서 비롯되어 8次에 걸친 개수를 거쳤다. 《廣東通志初稿》는 모두 四十卷이었으며 明 嘉靖 14年(1535)에 戴璟花가 兩個月에 걸친 纂修로 나왔다. 內容은 分野․山川․政紀․行次․疆域 等 五十多門을 포괄한다. 《廣東通志》 第二次 纂修는 明 嘉靖 36年(1557)이었으니 黃佐가 負責하여 1561年에 이르러 完成됐다. 全書 分七十卷, 內容은 分하여 十一門六十九類이며, 人物이 三分之一을 차지한다. 第三次 纂修는 明 萬曆 27年(159年), 郭裴․王學曾․袁昌祚 等이 책임을 지고 했으며 1602年에 完成됐다. 全書 分七十二卷, 內容分爲三十五門. 第四次 纂修는 淸 康熙 十四年.. 2018. 3. 9.
《주례(周禮)》 註 : 내가 늘상 하는 말이지만, 동아시아 문명의 그랜드디자이너는 바로 이 주례(周禮)란 괴물이다. 한우충동(汗牛充棟)한 그 많은 문헌 중에서도 오직 주례만이 국가를 어떻게 조직하고 운영해야 하는지를 법제화했기 때문이다. 함에도 어찌 주례를 이리도 무시하는가? 舊唐書 經籍志:“賈公彦義疏五十卷.”(新唐書同) 四庫全書總目:“今本四十二卷, 不知何人所改.” 賈公彦, 永年人. 唐高宗永徽中, 官太學博士, 著有周禮義疏․儀禮義疏(見舊唐書卷189儒學傳). 義疏乃本鄭玄注爲之, 以鄭注在唐時立於國學也. 淸孫詒讓周禮正義八十六卷. 按周禮一書, 漢書 藝文志云:“周官經六篇.” 原注:“王莽時, 劉歆置博士.” 漢書景十三王傳河間獻王:“修學好古, …所得書, 皆古文先秦舊書, 周官…之屬.” 賈氏周禮興廢引馬融傳(按:謂馬融周官傳, 見後漢書儒林傳董.. 2018. 3. 9.
왕승달(王僧達. 423~458) 南朝 宋의 大臣으로 지금의 山東에 속하는 낭야(琅邪)의 임기(臨沂) 사람이다. 대대로 大族이며, 臨川王 劉義慶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詩文을 잘 지어 당시에 자못 文名이 높았다. 나중에 시흥왕(始興王) 유준(劉濬)의 후군참군(後軍參軍)이 되었으며 의성태수(宣城太守)를 역임했다. 성격이 유렵(遊獵)을 좋아해 말을 타고 다니기를 좋아해 3~5일 동안 귀가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으며, 사냥하는 곳에서 사송(辭訟) 문서를 다루는 일도 있었다. 그때 太子 유구(劉劬)가 작란(作亂)하자 심양(尋陽)으로 도망쳤다. 뒤에 효무제(孝武帝)가 즉위하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임명되고 정로장군(征虜將軍)에 가작되었다. 왕승달은 사람됨이 자만심이 심해 재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군태수(吳郡太守)에 제수되어 외관으로 나갔다.. 2018. 3. 9.
영락대전永樂大典 永樂大典考(영락대전고) 출전 : 이혜은, ‘永樂大典考’, 《도서관》 2002년 겨울호( 제57권 제4호. )를 요약 발췌함 1. 편찬과정과 구성 명明 성조成祖(영락제永樂帝)는 건문제建文帝의 자리를 빼앗자 문인들의 반발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永樂 元年(1403) 7月1日 한림원翰林院 학사學士들에게 고금을 통한 경사자집經史子集 백가百家의 書와 천문天文, 지리地理, 음양陰陽, 의醫, 복卜, 잡기雜技에 이르기까지 모두 망라하여 분류分類 편찬하도록 명령하였다. 당시 翰林學士 해진解縉이 총재總載가 되었고 여기에 참여한 인원은 모두 147명이었다. 永樂 2年(1404) 11月에 책이 완성되자 『문헌대성文獻大成』이라 이름지었다. 그러나 『文獻大成』이 간략하다 생각하여 중수重修를 명하였다. 永樂 3年(1405) 남경南京.. 2018. 3. 9.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와 탕구(湯球) 편《십육국춘추집보(十六國春秋輯補)》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중국사에서 저명한 혼란기로 꼽히는 이른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를 이룩한 16국 역사를 기전체(紀傳體) 양식으로 다룬 사서(史書)로써, 그 혼란기를 수습한 북위(北魏) 왕조 때의 최홍(崔鴻)이란 사람이 찬자(撰者)이다. 최홍은 동청(東淸) 하현(河縣) 사람이니 이곳은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평원(平原) 서남쪽에 해당한다. 최광(崔光)의 종자(從子)이며, 청년 시절에 이미 수사(修史)에 뜻을 품었다고 한다. 서진(西晉)이 망하고 그 왕실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동진(東晉) 왕조를 건국하자 중원 지역에서는 흉노족(匈奴族)의 유연(劉淵)․갈족(羯族)의 석륵(石勒)․선비족(鮮卑族)인 모용괴(慕容廆)․저족(氐族)인 부견(苻堅) 등이 각축하면서 다투어 왕조를 세우니 이를 역사에서는 16.. 2018. 3. 9.
《상서대전(尙書大傳)》 《尙書大傳》은 전한(前漢) 초기 금문상서가(今文尙書家)인 복생(伏生)의 제자들인 장생(張生)과 구양생(歐陽生) 등에게서 유래하는 것으로 그들이 각자 들은 내용을 기록하고 기억을 덧보태어 이룩된 상서(尙書), 즉, 서경(書經)의 해설서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런 상서대전을 전형적인 주소(注疏) 류로 보기는 힘들다. 전형적인 注疏라면 본문격인 尙書 구절 하나하나를 해석하는 체제를 보이겠으나, 물론 그런 곳도 없지 않으나, 문장의 대의(大義)를 설명하는 곳이 많다. 따라서 체례(體例)는 《한시외전》(韓詩外傳)․《춘추번로》(春秋繁露) 등과 비슷하다. 《尙書大傳》 중 홍범(洪範) 約五十傳을 보면 首尾가 完備해 위후(緯候) 說의 선구를 이룬다. 상서대전에는 허다한 해설이 今文尙書 29편의 범주에서 나온다. 《尙書.. 2018. 3. 9.
《초학기(初學記)》 먼저 내가 이용하는 판본은 《初學記》(上․下) , 中華書局과 《初學記索引》, 中華書局 許逸民 編임을 유념하라. 初學記는 명칭이 시사하듯이 공부하는 초보자들을 위한 책인데, 당 현종 이륭기의 명을 받들어 광록대부(光祿大夫)이며 행우산기상시(行右散騎常侍)이며 집현원학사(集賢院學士)이며 부지원사(副知院事)이며 동해군개국공(東海郡開國公)인 서견(徐堅) 등이 봉칙찬(奉勅撰)해서 천자에게 받친 것이다. 성격별로 분류하자면, 유서(類書), 즉, 분류학 사전이다. 이보다 앞서 나온 비슷한 성격의 문헌으로는 저 유명한 예문유취(藝文類聚)가 있다. 예문유취야 그 분량과 그것이 커버하는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니, 이로써는 初學을 위한 교재가 되기는 힘들었다. 이에 현종은 皇子, 즉 자기 아들들을 위한 시문 교육용 교재 편찬을.. 2018. 3. 9.
공후(箜篌) “空侯”(공후) 또는 “坎侯”(감후)라고도 표기한다. 고대의 撥弦 악기 중 하나로 分臥式과 豎式 두 종류가 있다. 臥箜篌는 전하기를 漢 武帝 때 樂人인 侯調가 제작했다고 한다. 唐代 杜佑가 편찬한 《통전(通典)》에 이르기를 “漢武帝가 使 樂人侯調하여 所造케 하고는 以祀太一하게 했다. 或云하기를 侯暉가 所作한 것은 其聲이 坎坎 應節하여 謂之하기를 坎侯했다. 聲이 訛하여 爲 箜篌했다, 篌란 樂工人의 姓에서 말미암았을 뿐이다”고 했다. 나아가 《통전》은 “舊說一依琴制. 今按其形, 似瑟而小, 七弦, 用撥彈之如琵琶也”라고 했다. 豎箜篌는 豎琴의 前身으로서 後漢 時에 西域을 거쳐 中原에 들어왔다. 다시 《通典》에 근거할 때 “豎箜篌는 胡樂也라, 漢 靈帝가 好之하여, 體는 曲하지만 長하며, 二十二 弦이 있고, 懷中에.. 2018. 3. 9.
강적(羌笛) 고대 羌族의 민간에서 광범위하게 유포된 吹管 악기의 일종으로 강관(羌管)이라고도 한다. 그 역사는 유구해 漢代 이래 역사문헌에서 그에 관한 기록이 적지 않다. 《풍속통(風俗通)》에 이르기를 “漢武帝時에 丘仲이 笛을 作하니 그 후에 또 강적(羌笛)이 있었다”고 했다. 陳暘의 《樂書》에는 또 이르기를 “羌笛은 구멍이 다섯이다. 馬融이 賦笛에서 이르기를 羌中에서 왔으며 舊制에는 구멍이 4개였을 뿐이다. 京房에서는 구멍 하나를 더하니 그리하여 五音을 갖춘다”고 했다. 隋․唐에서 宋․元․明 各代에 이르기까지 강적은 文人의 詩文에서 자주 보인다. 王之渙의 《涼州詞》에 이르기를 “羌笛何須怨楊柳, 春風不度玉門關”라고 했으며. 範仲淹은 《漁家傲》에서 읊기를 “羌管悠悠霜滿地, 人不寐, 將軍白發征夫淚”라고 했다. 羌笛은 油.. 2018. 3. 9.
삼도(三都) 東漢 시대에 “三都”란 東都인 낙양(雒陽. 지금의 洛陽市 東北), 西都인 장안(長安), 南都인 宛(河南 南陽市)을 지칭한다. 晉나라 때 左思가 읊은 《삼도부三都賦》의 “三都”란 삼국시대 蜀都인 성도(成都) 吳都인 건업(建業. 南京), 魏都인 업(鄴. 河北 臨漳縣 西南 鄴鎭 동쪽 1.5㎞)을 말한다. 唐代에 “三都”란 東都 洛陽, 北都 진양(晉陽. 太原市), 京都인 長安이다. 2018. 3. 9.
《대대례기(大戴禮記)》 《大戴禮記》는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西漢 대덕(戴德) 撰이다. 공영달(孔穎達) 撰 《예기정의(禮記正義)》 大題下에 인용된 鄭玄의 《六藝論》에서 이르기를 “戴德이 《記》85篇을 전하니 《大戴禮》가 곧 이것이다. 대성(戴聖)이 《禮》49篇을 전하니 이것이 곧 《禮記》라는 것이다”(戴德傳《記》八十五篇,則《大戴禮》是也;戴聖傳《禮》四十九篇,則此《禮記》是也)라고 했다. 또, 육덕명(陸德明)이 撰한 《경전석문(經典釋文)》 ‘敍錄’에 인용된 晉나라 때 사람 동소陳邵의 《주례론서(周禮論序)》에 이르기를 “戴德이 古《禮》二百四篇을 刪하여 八十五篇을 만드니 이를 일러 《大戴禮》라 한다. 戴聖이 《大戴禮》를 산삭하여 四十九篇을 만드니 이것이 《小戴禮》다”(戴德刪古《禮》二百四篇爲八十五篇,謂之《大戴禮》;戴聖刪《大戴禮》爲四十九篇,.. 2018. 3. 9.
우세남(虞世南. 558~638) 字가 백시(伯施)다. 남북조시대 남조(六朝)의 하나인 진(陳)의 무제(武帝) 2년(558)에 지금의 절강(浙江)에 속하는 월주(越州) 여요(餘姚)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陳朝에서는 고야왕(顧野王)에게 배워 10년 동안 게을리 함이 없으니 그의 문장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수(隋)가 천하통일을 이룬 뒤에는 양제(煬帝)를 섬겨 근신이 되었으나 그다지 중용되진 못했다. 당이 건국하고는 환갑이 넘어 그에 합류했으나 고조(高祖) 이연(李淵) 시대에도 그다지 중용을 받지 못한 듯하다. 그러다가 李世民이 나이 많고 학식이 뛰어난 그를 중용하게 된다. 정관(貞觀) 초기에는 그의 상객이 되어 문학관(文學館)을 개설해 이곳에다 전국 인재를 불러 모으니 우세남은 그 종(宗) 노릇을 하게 된다. 홍문관(弘文館) 학사(學士.. 2018.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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