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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정(嚴貞)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33대 성덕왕(聖德王)은 이름이 흥광(興光)인데 본명은 륭기(隆基)이다. 효소(孝昭)의 모제(母弟)이다. 선비(先妃)는 배소왕후(陪昭王后)이니, 시호가 엄정(嚴貞)으로 원대(元大) (아간) 딸이다. 후비(後妃)는 점물왕후(占勿王后)이니 시호는 소덕(炤德)이니 순원(順元) 각간(角干)의 딸이다. 임인년에 즉위해 35년을 다스렸다. 능은 동촌(東村) 남쪽에 있으니 양장곡(楊長谷)이라고도 한다. 2018. 3. 7.
배소(陪昭)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33대 성덕왕(聖德王)은 이름이 흥광(興光)인데 본명은 륭기(隆基)이다. 효소(孝昭)의 모제(母弟)다. 선비(先妃)는 배소왕후(陪昭王后)이니, 시호가 엄정(嚴貞)으로 원대(元大) (아간) 딸이다. 후비(後妃)는 점물왕후(占勿王后)이니 시호는 소덕(炤德)이니 순원(順元) 각간(角干)의 딸이다. 임인년에 즉위해 35년을 다스렸다. 능은 동촌(東村) 남쪽에 있으니 양장곡(楊長谷)이라고도 한다. 2018. 3. 7.
김운(金運) 김흠운의 잘못된 표기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은 김씨다. 이름은 정명(政明)이고 자(字)는 일소(日炤)이다. 아버지는 문호왕(文虎王)이고 어머니는 자눌왕후(慈訥王后)이다. 비는 신목왕후(神穆王后)이니 김운공(金運公)의 딸이다. 신사년에 즉위해 11년을 다스렸다. ☞김흠운 2018. 3. 7.
김흠운(金欽運) 김흠운(金歆運)과 같은 인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 왕력 편에서는 김운(金運)이라고 표기돼 있는데 이는 金欽運 혹은 金歆運에서 중간 글자가 탈락된 데서 빚어진 결락으로 판단된다. 두 표기가 같은 인물이라면, 그는 나밀왕 8세손으로 아버지는 잡찬 달복이다. 어려서 화랑 문노의 유파에서 심신을 수련하면서 특히 목숨을 불사하는 군인의 길을 지향했다. 그러다가 영휘(永徽) 6년(무열왕 2년, 655), 조천성(助川城) 전투에 낭당대감(郎幢大監)으로 출전해 백제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이를 기려 태종대왕은 일길찬을 추증했다. 죽으면서 남긴 말이 "신라 귀골(貴骨)로 대왕의 반자(半子)"라 했으니, 태종대왕 사위임을 알 수 있지만 부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가 죽은지 28년 뒤인 신문왕 3년(683.. 2018. 3. 7.
문노(文努) 화랑세기 문노 전 : 8세 문노(文弩)는 비조부공(比助夫公) 아들이다. 어머니는 가야국(加耶國) 문화공주(文華公主)인데 문화공주는 야국왕(野國王)이 바친 여자(貢女)라고 한다. 《호조공기》(好助公記)에는 ‘북국왕녀(北國王女)’라고 되어 있는데, 문노는 스스로 가야가 외조(外祖)라고 말했으니, 북국은 가야의 북국일 것이다. 법흥대제가 가야를 나누어 남․북으로 하면서 이뇌(異腦)는 북국왕(北國王)으로 삼고는 양화공주(兩花公主)를 처로 삼게 하고, 청명(靑明)은 남국왕(南國王)으로 삼았다. 얼마 되지 않아 이뇌의 숙부 찬실(贊失)이 이뇌를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 때 호조공(好助公)이 가야에 사신으로 가서 책망했다. 이보다 앞서 찬실은 야국왕의 사위가 되었는데, 문화공주는 생각건대 틀림없이 찬실의 딸일.. 2018. 3. 7.
김흠운(金歆運) 생존연대와 이름 표기, 그리고 관위 등을 고려할 때 김흠운(金欽運)과 같은 인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권제47(열전 제7) 김흠운 : 김흠운(金歆運)은 나밀왕(奈密王) 8세손이다. 아버지는 잡찬 달복(達福)이다. 흠운이 어려서 화랑 문노(文努)의 아래에서 놀았는데 당시의 무리들이 아무개는 전사하여 이름을 지금까지 남겼다고 말하자 흠운이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며 격동하여 그와 같이 되려고 하니 동문의 승려 전밀(轉密)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만약 전쟁에 나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영휘(永徽) 6년(무열왕 2: 655) 태종대왕이 백제가 고구려와 더불어 변방을 막자 이를 치고자 하여 군사를 출동할 때에 흠운을 낭당(郎幢) 대감으로 삼았다. 이에 그는 집안에서 자지 않고 비바람을 맞으며, .. 2018. 3. 7.
김달복(達福) 삼국사기 권제47(열전 제7) 김흠운 열전 : 김흠운(金歆運)은 나밀왕(奈密王) 8세손이다. 아버지는 잡찬 달복(達福)이다. 2018. 3. 7.
달복(達福) ☞김달복(金達福) 2018. 3. 7.
신목(神睦) 황복사석탑금동사리함기(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記. 706년. 신라 성덕왕 5년, 당 중종 신룡 2년) : 신문대왕(神文大王)이 오계(五戒)로 세상에 응하고 십선(十善)으로 백성을 다스려 통치를 안정하고 공(功)을 이루고는 천수(天授) 3년(692) 임진년 7월 2일에 돌아갔다. 신목태후(神睦太后)와 효조대왕(孝照大王)이 받들어 종묘(宗廟)의 신성한 영령(英靈)을 위해 선원가람(禪院伽藍)에 삼층석탑을 세웠다. 성력(聖曆) 3년(700) 경자년 6월 1일에 신목태후(神睦太后)가 마침내 세상을 떠나 높이 극락에 오르고 대족(大足) 2년(702) 임인년 7월 27일에는 효조대왕(孝照大王)도 승하하였다. 신룡(神龍) 2년(706) 경오년 5월 30일에 지금의 대왕이 부처 사리 4과와 6치 크기의 순금제 미타상 1구와 .. 2018. 3. 7.
효종(孝宗) ☞김효종(金孝宗) 2018. 3. 7.
김효종(金孝宗) 삼국사기 권제12(신라본기 제12) 효공왕 : 6년(902) 봄 3월에 서리가 내렸다. 대아찬 효종(孝宗)을 시중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권 제48(열전 제8) 효녀 지은 : 효녀 지은(知恩)은 한기부(韓部) 백성 연권(連權)의 딸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나이 32세가 되도록 시집을 가지 않고 아침 저녁으로 문안드리며[定省] 곁을 떠나지 않았다. 봉양할 것이 없으면 때로는 품팔이도 하고 또는 돌아다니며 밥을 빌어다가 봉양하였다. 그러한 날이 오래 되어 고달픔을 이기지 못하여 부자집에 가서 몸을 팔아 종이 되기로 하고 쌀 10여 섬을 마련하였다. 온 종일 그 주인 집에 가서 일을 하여주고 저녁에는 밥을 지어 가지고 와서 봉양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 2018. 3. 7.
지은(知恩) 삼국사기 권 제48(열전 제8) 효녀 지은 : 효녀 지은(知恩)은 한기부(韓部) 백성 연권(連權)의 딸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나이 32세가 되도록 시집을 가지 않고 아침 저녁으로 문안드리며[定省] 곁을 떠나지 않았다. 봉양할 것이 없으면 때로는 품팔이도 하고 또는 돌아다니며 밥을 빌어다가 봉양하였다. 그러한 날이 오래 되어 고달픔을 이기지 못하여 부자집에 가서 몸을 팔아 종이 되기로 하고 쌀 10여 섬을 마련하였다. 온 종일 그 주인 집에 가서 일을 하여주고 저녁에는 밥을 지어 가지고 와서 봉양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3∼4일이 지나자 그 어머니가 딸에게 말하기를 “지난 날의 식사는 거칠었으나 밥 맛이 달았는데 지금 식사는 좋으나 맛이 옛 .. 2018. 3. 7.
인경(仁慶) ☞김인경(金仁慶) 2018. 3. 7.
김인경(金仁慶) 삼국사기 권 제48(열전 제8) 효녀 지은 : 효종(孝宗)은 당시 제3재상 서발한(舒發翰) 인경(仁慶)의 아들로 어릴 적 이름은 화달(化達)이었다. 왕이 말하기를 “그는 비록 어린 나이라고는 하지만 문득 인격이 완성된 어른처럼 보인다.” 하고 곧 자기 형 헌강왕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2018. 3. 7.
화달(金化達) ☞김화달(金化達) 2018. 3. 7.
김화달(金化達) 삼국사기 권 제48(열전 제8) 효녀 지은 : 효종(孝宗)은 당시 제3재상 서발한(舒發翰) 인경(仁慶)의 아들로 어릴 적 이름은 화달(化達)이었다. 왕이 말하기를 “그는 비록 어린 나이라고는 하지만 문득 인격이 완성된 어른처럼 보인다.” 하고 곧 자기 형 헌강왕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2018. 3. 7.
매형공주(妹兄公主) 이 매형공주는 공주의 이름일 수도 있으며, 일반명사로 본다면 누이동생 중에서도 맡공주라는 뜻일 수도 있다. 백제 창왕명 석조 사리감(百濟昌王銘石造舍利龕) : 백제창왕(百濟昌王) 13년(567. 위덕왕 13) 태세(太歲) 정해(丁亥)에 매형공주(妹兄公主)가 사리를 공양하다.(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 2018. 3. 7.
창(昌) 삼국사기 권제27(백제본기 제5) 위덕왕 즉위년 : 위덕왕(威德王)은 이름은 창(昌)이고 성왕의 맏아들이다. 성왕이 재위 32년에 죽자 왕위를 이었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27대 위덕왕(威德王)은 이름이 창(昌)이며 명(明)이라고도 한다. 갑술년에 즉위해 44년을 다스렸다. 삼국사기 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영양왕 : 9년(598) [봄 2월에] 왕은 말갈의 무리 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략하였는데, 영주(營州) 총관(摠管) 위충(韋)이 이를 격퇴시켰다. 수나라 문제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노하여 한왕(漢王) 양(諒)과 왕세적(王世積)을 모두 원수(元帥)로 삼아서, 수군과 육군 30만을 거느리고 와서 [고구려를] 쳤다. 여름 6월에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의 관작을 빼앗았다. 한왕 양의 군사가 .. 2018. 3. 7.
창왕(昌王) 삼국사기 권제27(백제본기 제5) 혜왕 즉위년 : 혜왕(惠王)은 이름이 계(季)이고 명왕(明王)의 둘째 아들이다. 창왕(昌王)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권제27(백제본기 제5) 법왕 즉위년 : 법왕(法王)은 이름이 선(宣)이고 혜왕 맏아들이다. 혜왕이 죽자 아들 선이 왕위를 이었다. 삼국사기 권제27(백제본기 제5) 위덕왕 즉위년 : 위덕왕(威德王)은 이름은 창(昌)이고 성왕의 맏아들이다. 성왕이 재위 32년에 죽자 왕위를 이었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27대 위덕왕(威德王)은 이름이 창(昌)이며 명(明)이라고도 한다. 갑술년에 즉위해 44년을 다스렸다. 삼국사기 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영양왕 : 9년(598) [봄 2월에] 왕은 말갈의 무리 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략하였는데, 영주(.. 2018. 3. 7.
위덕왕(威德王) 삼국사기 권제27(백제본기 제5) 위덕왕 : 위덕왕(威德王)은 이름은 창(昌)이고 성왕의 맏아들이다. 성왕이 재위 32년에 죽자 왕위를 이었다. 원년(554)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웅천성(熊川城)을 공격해 왔으나 패하여 돌아갔다. 6년(559) 여름 5월에 초하루 병진에 일식이 있었다. 8년(561) 가을 7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쳐서 약탈하었다. 신라 군사가 나가 쳐서 이기니 죽은 자가 1천여 명이었다. 14년(567) 가을 9월에 사신을 진(陳)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7년(570)에 고씨의 제나라[高齊] 후주(後主)가 왕을 사지절(使持節) 시중(侍中)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대방군공(帶方郡公)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 18년(571)에 고씨의 제나라[高齊] 후주(.. 2018. 3. 7.
구수왕(仇首王) 삼국사기 권 제24(백제본기 제2) 구수왕 : 구수왕(仇首王)은 초고왕(肖古王)의 맏아들이다. 키가 일곱 자[尺]요 위엄과 거동이 빼어났다. 초고가 재위 49년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3년(216) 가을 8월에 말갈이 와서 적현성(赤峴城)을 포위하였다. 성주가 굳게 막으니 적이 퇴각하여 돌아갔다. 왕이 굳센 기병 800명을 거느리고 추격하였는데, 사도성(沙道城) 아래에서 싸워 이를 격파하여 죽이거나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4년(217) 봄 2월에 사도성 옆에 두 개의 목책을 설치하였는데 동서로 서로 떨어진 거리가 10리였다. 적현성의 군졸을 나누어 [보내] 지키게 하였다. 5년(218)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의 장산성(獐山城)을 포위하였다. 신라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니 아군이 패배하였다... 2018.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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