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전체 글20971

거울인가 안내판인가? 문화재 안내판 문제는 전임 정권 시절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 문재인 당시 대통령까정 나서서 역정을 내시기에 이르렀으며 이를 고비로 그 역정이 발발한 그해만 해도 문화재청이 없는 돈 박박 긁어 59억원인가를 급조해 개선이랍시며 이래선 안대겠다 해서 손을 대기 시작했으니 그래서 괄목할 만한 개선이 이뤄지지 않았다곤 할 수 없으나 피장파장 새로 썼다는 문구는 구습을 답습할 뿐이요 아 이거다 하는 사례는 눈 씻고 찾기도 힘들뿐더러 구조 재질만 해도 명경인지 안내판인지 그 기능을 종잡기 힘든 저런 사례가 여전히 부지기라 이곳 봉은사는 현직 대통령도 한두 번 간 곳으로 알고는 있는데 이 안내판은 못 보신듯. 2023. 6. 19.
심순애를 걷어찬 이수일은 고등중학생 고등학교라는 것은 일제시대에 일본에만 있었고 조선에는 없었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다. 조선에는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교육기관이 경성제대 예과였고, 원래 구제학제에서는 대학예과와 고등학교가 동급으로 대학 진학시 최우선권을 받고 여석이 있을 경우 봐 가면서 전문학교를 고등학교 학력인정으로 받는 것이 통례였다. 대학 선수과에 입학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다. 조선인들은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면 대개 이런 방식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일본에서는 고등학교라고 하면,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학했기 때문에 (해방이후 대학입시가 이에 해당한다) 고등학교, 혹은 대학예과 재학생에게 대학입학은 전혀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대학 예과생은 본과로 거의 그대로 들어갔으며 고등학교 졸업.. 2023. 6. 19.
꽈배기 부인이 된 라일락 아무리 봐도 라일락이다. 강남 봉은사 경내라 라일락이 몇살을 드시면 저런 꽈배기가 되는가? 광화문 연가 부를 땐 라일락 꽃 향기를 맡는다는데 늙은 라일락에선 늙은 라일락 꽃 향기가 나지 않는가? 저런 라일락이 메마른 대지를 뚫고 오르는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 점찍은 시인도 있었다. 그나저나 라일락 맞어? 2023. 6. 19.
너무 잘난 형을 둔 흠순欽純 (6) 블루칩을 투자하는 수망택주水望宅主 염장廉長은 같은 가야 혈통이기는 하지만 금관가야 계통인 김유신-김흠순 형제와는 달리 지금의 경북 고령에 기반을 둔 대가야 계통이다. 그럼에도 묘하게도 가야라는 동질 의식을 공유했으니, 이 점이 실로 묘하다. 김유신만 해도 훗날 일통삼한을 달성한 뒤에는 대가야 혈통인 문노文弩를 추앙해 그의 화상을 포석사에 모시기도 했으니, 군사 분야에서 혁혁한 전과를 냈다는 그것 말고도 짙은 가야 동질 혈통 의식이 작동했다. 염장은 595년생인 김유신보다 아홉살이나 많은 586년생이라, 그럼에도 모든 면에서 유신에 밀렸다. 그가 뛰어넘기에는 유신은 너무나도 백그라운드가 막강했다. 그래서 화랑도 유신이 먼저 했다. 하지만 유신한테 뒤졌지 당대 신라를 통털어 염장 역시 막강한 후광을 등에 엎은 금수저 출신이었다. 또 다른 여.. 2023. 6. 19.
왼쪽 겨드랑이 안쪽에 청동칼을 지팡이처럼 찡군 전사의 시체 독일 남부지방에서 삼천사백년 전, 구체로는 기원전 14세기 말 무렵에 만든 중기 청동기시대 무덤에서 단면 팔각 구조인 자루 갖춤 청동검 발굴소식이 타전된 일을 앞서 정리했거니와 성인 남녀 각 한 명과 아이 한 명까지 총 셋을 동시기에 묻은 이 무덤 발굴 정보가 빈약하기 짝이 없는데 이를 발굴하고 이를 허가한 데서 이걸로 계속 장사를 해먹을 요량인지 모르겠으니 무엇보다 유구 전체 양상을 보여주는 사진 한 장도 없고 그 전체 양상에 대해선 셋을 묻었다는 그 달랑한 기술 말고는 전연 없어 그 꼴을 보면 북한 당국 고고학 성과 공개와 진배 없다. 하다 못해 그 칼 규모가 어떤지 길이 하나 공개하지도 않았으니 그렇다고 그런 간단한 보도자료를 접한 기자들도 보니 현장을 가 본 놈은 없고 모조리 보도자료 베끼느라 정.. 2023. 6. 18.
이른바 식민지의료, 일제시대 연구 무엇이 문제인가? 현행 일제시대 연구의 구조에 대해 조금 써보겠다. 지금까지 일제시대 연구는 일단 결론을 내고 시작한다. 일제시대는 무조건 문제다. 조선은 무조건 선이다 라고. 이렇게 설정하고 그러면 왜 문제인가를 바닥부터 규명하면 좋은데 그건 또 많이 미흡하다. 이러다 보니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나는 논문이 나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억지도 나오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일제시대 의료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 시대 의료를 "식민지의료"라고 정의하고 서술하는 경우를 본다. 필자도 일제시대 의료가 정상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제시대 교육이 정상이 아니었듯이. 그런데 문제는 이 "식민지의료"가 왜 "식민지의료"인지 정확히 규명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이 전통의료, 국치 때까지 주류를 차지하.. 2023. 6. 18.
일제시대의 지식인: 스핀오프 (1): 가와바타 야스나리 이제 일제시대의 교육제도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으니 노벨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かわばた やすなり, 1899~1972)의 프로필을 보자. 三島郡豊川尋常高等小学校(1906-1912) -- 茨木中学校 (1912-1917) -- 第一高等学校文科第一部乙類 (1917-1920) -- 東京帝国大学文学部 (1920-1924) 아주 심플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필자가 리뷰한 조선인들보다 시기가 약간 빨리 교육받은 사람인데도 소학교 (6년) - 중학교 (5년) - 고등학교 (3년) - 제국대학 (4년)의 기간이 잘 맞는 시계처럼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조선의 송몽규 같은 이가 일본에서 태어났다면 이런 프로필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는 연전을 거쳐 쿄토제대.. 2023. 6. 18.
일제시대의 지식인: [32] 유치진 극작가 유치진 선생의 프로필이다. 통영공립보통학교 (1914-1918)--- 도쿄 토요야마(豊山)중학교에 편입 (1921-1925)--- 릿쿄대 예과 (1926-1927) ---- 릿쿄대 영문과 (1927-1931) 프로필을 보면, 선생의 보통학교가 4년인것은 이때까지도 조선의 보통학교가 4년제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보통학교가 6년제가 되는 것은 1922년 부터이다. 중학교때 이미 일본 유학을 했는데 당시로서는 드문 프로필이다. 선생의 집안이 여유가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 같다. 중학은 4년만에 졸업했는데 이 당시 중학은 5년제였다. 단, 학생이 우수한 경우 4년만에 졸업이 가능하기도 했는데, 이 부분은 확인이 필요할 것 같다. 릿쿄대 예과를 1년 다닌것으로 되어 있는데 중학을 졸업했으니 고등학교 과.. 2023. 6. 18.
고려의 교육열을 증언하는 고려도경의 구절들 백성[民庶] 신(臣)이 듣기에, 고려는 영토[地封]가 넓지 않으나 백성은 매우 많다. 사민(四民)의 업(業) 중에 선비[儒者]를 귀하게 여기므로, 고려에서는 글을 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산림은 매우 많고 땅은 평탄한 데가 적기 때문에, 경작하는 농민은 장인[工技]에 미치지 못한다. 주군(州郡)의 토산물[土産]은 모두 관아[公上]에 들어가므로, 상인[商賈]들은 멀리 돌아다니지 않는다. 다만 대낮에 시장[都市]에 가서 각각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써 없는 것을 서로 바꾸는 정도에 만족한다. 그러나 고려 사람들은 은혜를 베푸는 일이 적고 여색[色]을 좋아하며, 쉽게 사랑하고[泛愛] 재물을 중히 여긴다. 남녀간의 혼인에서도도 가볍게 합치고 쉽게 헤어져註 001 전례(典禮)를 본받지 않으니 참으로 웃을 .. 2023. 6. 18.
지금도 반짝반짝 푸른빛 띠는 3천년 전 유럽 청동검(보도자료 원문 첨부) 앞 첨부문건이 이번 발견을 정리한 보도자료다. 구글 번역기 돌리면 된다. 영어는 독일어에서 갈라져 나온 언어라 자동번역 정확성은 99%다. 관련 동영상은 아래 유툽을 보라. 언어? 신경 쓸 거 없다. 그림만 보면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H-o-SKenZY4 유럽 대륙에서 3천년 전 청동기시대 청동칼 1점이 발굴됐다 해서 이 업계에서는 인구에 회자하는 모양이라, 무엇보다 이 친구 상태가 지금 만든 듯이 반짝반짝 윤기가 나서다. 한데 어째 청동검 길이가 얼마인지 도대체 안 보이는가? 기자들이 질문도 안 했는가? 하긴 장강 남쪽 오월吳越 시대 춘추시대 말기 칼들을 보면 대개 이 상태인데, 그에 비견할 만한 상태인가 보다. 실제 배포한 사진들을 보니 반짝반짝 기름칠한 듯.. 2023. 6. 18.
못 배운 한에 대하여 한국은 과거제가 천년을 간 나라다. 이 부분이 갖는 의미를 간과하기 쉬운데, 고려사절요만 봐도, 고려시대부터 이미 식년시는 정례화해 있었다. 3년에 한번씩 고려시대에는 34명 (조선시대와 달리 33명이 아니다) 꼬박 꼬박 급제자가 나왔다. 이것은 대단한 것이다. 3년에 한번씩 34명씩 뽑아 올려도 3년 후에 다시 뽑아 올릴 인재풀이 있다는 소리니까. 고려도경을 봐도 고려시대는 과거제에 기반한 사대부 사회로 이러한 전통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갔다. 일제시대, 식민지조선이 다른 식민지와 달랐던 점은 배워야 한다는 점을 식민지 조선인에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공부하면 출세한다는 것을 조선인들은 다 알았다. 돈이 없고 학교가 없어 못 갔을 뿐이다. 돈이 없어 학교를 못갔으니 한이 생길 수밖에 없다... 2023. 6. 18.
민립대 설립운동을 다시 본다 우리나라 일제 식민지사에서 민립대 설립운동의 의의는 대단히 크다. 그 중요성에 비해 현재까지 이 운동의 시작과 실패는 조선인이 대학을 만들려고 했는데 일제가 방해해서 실패했다. 끝. 이 정도 설명에 그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이 대학의 문제가 조선과 일본의 30년대 이후 차별화의 모든 근간이나 다름없다. 차별은 개인의 편견에 의해 주어 질때는 그다지 무서운 것이 아니다. 차별이 구조화해서 재생산 되게 되어 있을 때가 무서운 것이다. 일제시대 후반부의 조선인 차별은 그런 식으로 구조화했기 때문에 무서운것 인데 그 구조화의 바닥에는 조선땅의 고등교육의 부재가 있었다. 이 부분을 재검토하여 전모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각설하고, 전술한 바와 같이 연희전문의 대학승격이 이루어졌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 2023. 6. 18.
사이비논쟁에 부쳐, 역사논쟁은 무식하다는 전제에서 비롯한다 바로 앞에서 나는 소설 코너로 간 정사 삼국지를 거론했다. 이걸 두고 어느 저명한 역사학도는 무식한 서점 직원이라 낄낄 거렸다. 정사 삼국지와 소설 삼국지, 곧 삼국지의연의도 구별하지 못한 서점 직원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라고 낄낄 거렸다. 이 사례는 왜 한국사회에서 툭하면 터지는 사이비역사논쟁을 성찰하는 좋은 사례가 된다. 무식하다? 천만의 말씀. 그들은 이른바 정통역사학도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똑똑하며 그 꼭대기에 올라가 있음을 망각한 처사다. 그 서점 직원은 누구보다 정사 삼국지가 무엇인지를 잘 알았다. 소설 삼국지를 찾는 독자들이 정사 삼국지 또한 같이 찾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으며, 그런 까닭에 소설 코너에다가 정사 삼국지를 당당히 진열한 것이다. 왜? 정사, 곧 정통 역사학은 소설 삼.. 2023. 6. 18.
일제시대 연희전문의 대학승격 앞에도 썼지만 1920년대, 조선인의 대학을 세운다면 대학령에 따라 연희전문이 대학으로 승격되는 게 가장 현실성 있는 안이었다. 3.1운동 이후 민립대학운동은 전국적으로 모금하여 조선인의 대학을 세운다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맨바닥에서 대학을 새로 세우는 일은 일본땅에서도 힘들었다. 일본이 대학령 발효후 제국대학 외에 대학이 된 곳은 거의 모두 기존에 전문학교였던 곳이었다. 특히 의전이 대학으로 바뀐 곳이 많았는데, 1920년대 당시 연전은 대학승격한 도시샤대학과 비슷하거나 약간 더 잘 준비된 경우가 아닐까 (학과의 수는 오히려 연전이 많고 당시 연전은 4년제였다). 만약 연전이 세브란스와 합쳐져 대학 승격을 요구했다면 일제는 상당히 곤란했을 것이다. 그 정도 규모의 전문학교가 대학승격을 요구하면 일본 본.. 2023. 6. 18.
일제시대의 지식인: [31] 정지용 시인 정지용鄭芝溶(1902~1950)은 선생에 대해 쓴다. 그의 프로필은 다른 데는 소략하고 한글 위키에 비교적 자세하게 나와 있다. 요약하면, 옥천보통학교 (1914) -- 휘문고보 (1918-1922) -- 도시샤대 영문과 (1923-1929) 선생의 휘문고보 재학 기간이 4년인데, 1922년부터 조선의 고보는 5년제로 바뀐다. 따라서 선생이 졸업한 1922년 당시 휘문고보는 4년제 맞다. 정지용은 일본 도시샤대(동지사대)에는 6년을 재학하였다는데, 예과 (혹은 전문과) 3년, 본과 3년으로 보면 딱 맞아 떨어진다. 다시 확인해 보니 도시샤대에는 전문부가 없었던 것 같다. 대신 예과는 확실히 존재했으므로, 정지용은 도일 당시 중학졸업 학력이므로 도시샤대 예과로 진학하여 3년과정을 마치고 본과에서 영문.. 2023. 6. 18.
소설 코너로 간 정사 삼국지 지금도 사정이 그런지 모르겠다. 교보문고를 기준으로 얘기하겠다. 정사 삼국지 완역판을 표방한 출판물이 내 기억으로는 김원중씨가 옮긴 전7권짜리가 몇년전까지 유일했다. 지금은 사정이 일변해서 그 개정판도 나오고 다른 사람 완역본도 있으며 그에 더해 그 방대한 자치통감 중에서도 삼국시대 부분만 번역한 것이 한두종 있다. 근자에는 그런 중국 정사 완역 바람이 사기로 몰아쳐 너도나도 정사 완역, 제대로된 번역을 표방한 것이 서너종 쏟아져나왔다. 근자엔 한서도 완역본을 준비 중인 곳이 있는 줄로 안다. 각설하고 정사 삼국지 번역본은 중국역사코너가 아니라 소설 코너에 진열했다. 이걸 보고 어떤 역사연구가연 하는 사람이 이르기를..서점 직원들이 무식해서 말이야. 정사 삼국지하고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도 구분못해서 .. 2023. 6. 17.
우리나라 현판과 잘쓴 글씨 일반화는 그렇지만, 잘쓴 글씨 맞나? 싶은 글씨들이 있다. 아무리 봐도 좌우 정렬도 안 된 글씨를 극찬하는 경우도 있어서 이런 것은 동아시아에서도 한국이 두드러지는 것 같은데, 필자는 솔직히 서예는 잘 모르지만, 중국과 일본에서 상찬하는 글씨를 보면 이거 어째 글씨가 저러냐 갸윳한 적은 별로 없다만, 유독 우리나라에서 상찬하는 글씨, 현판을 보면 가로세로도 안 맞고 글씨 크기도 안 맞고, 아무리 명필이라도 가로세로 글씨 크기는 맞춰야 하는거 아님? 서예에 도통하면 고졸해진다고 한다면 할 말 없다. 2023. 6. 17.
아파트가 퇴출한 평면 지향 ㅁ자형 한옥 건축 종로구 안국동과 가회동 경계를 이루는 윤보선가尹潽善家 전면 한옥채들이다. 첫 사진 뒤쪽 철근콘크리트 건물이 헌법재판소라 저 언저리가 연암 박지원 손자 박규수가 살던 집이다. 현재 보는 건물들이야 지붕 담장 쏵 개비했지만 저 면모가 조선후기 그 면모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보아 대과가 없다. 윤보선가야 말할 것도 없다. 이 일대는 창덕궁과 경복궁에 낀 지점이고 무엇보다 북악 언저리라 언덕배기라 홍수에 따른 침수 우려가 거의 없는 지역이며 무엇보다 겨울이면 매서운 바람 휘몰아치는 광화문 일대와는 달랐으니 그런 까닭에 날고 긴다는 사람들만 사는 부촌이었다. 저거 발굴해 보나마나 저 골목길 건물 구조 마당 등등 고스란히 지금 모습이 조선시대, 특히 조선후기 그대로다. 조선시대 날고긴다는 사람들이 산 기와집은 예외없.. 2023. 6. 17.
현판으로는 꽝인 추사 글씨 첫째 추사체는 현판이나 편액 글씨로는 꽝이다. 둘째 七十一果病中作이 71세 과천 노인이 병중에 쓰다 인가? 추사가 말년에 사는 곳 과천을 빌려 스스로를 果라 했다는데 글쎄 좀 미심쩍다. 첨엔 累病이라 읽었는데 모르겠다. 죽기 직전 저걸 썼다는데 오늘내일 하는 뇐네가 殿板 글자 大筆을 갈길 힘이 있었는가? 낙관엔 완당阮堂이라 썼는데 진짜 김정희 낙관인가? 강남 봉은사서 剡溪 초하다. 2023. 6. 17.
기록으로만 남은 삼일고가도로 삼일(3.1)고가도로 완성, 1969 The Opening of Sami|(3.1) Elevated Motorway 삼일(3.1)고가도로 개통식, 1969 The Opening Ceremony of Sami|(3. 1) Elevated Motorway 고가도로 교량의 구조 Structure of Motorway Bridge Piers 高架路析梁的结构 高架道路橋梁の構造 청계고가도로는 콘크리트 거데(girder) 대신 거더와 상판 모두 철강을 주재료로 사용했다. 이는 한국에서 최초로 건설되는 형태의 다리였기 때문에 미국과 일본 기술을 도입하고, 일본에서 수입한 철강으로 상판을 만들었다. The Cheonggye Elevated Motorway was constructed using steel girders .. 2023. 6. 17.
너무 잘난 형을 둔 흠순欽純 (5) 미스터리 국정자문위원 렴장廉長 김유신-흠순 형제가 한창 주가를 날리던 시대, 신라에서 돈과 권력으로 정계를 주무른 이로 렴장廉長이란 사람이 있다. 하지만 염장은 미스터리다. 그건 다른 무엇보다 꼴랑 한 군데 고개를 내밀고는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꼴랑 한 번 고개를 들이민 사람이 대단했을 것임을 우리는 어찌 아는가? 이를 위해 위선 우리는 그 꼴랑 한 번하는 장면을 음미해야 한다.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 진덕왕眞德王 이라는 제하 이야기에 보이는 대목이다. “(진덕여)왕이 즉위한 시대에 알천공閼川公·림종공林宗公·술종공述宗公·호림공虎林公(자장慈藏의 아버지다)·렴장공廉長公·유신공庾信公이 있었다. 이들은 남산南山 우지암亏知巖에 모여 나랏일을 의논했다.” 간단히 말해 왕은 꿔다논 보릿자루였고, 실제는 이들 여섯 분이서 나라일을.. 2023. 6. 17.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