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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실불(芮悉弗) 삼국사기 권 제19(고구려본기 제7) 문자명왕본기 : 13년(504) 여름 4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북위) 세종(世宗)이 사신 예실불(芮悉弗)을 동당(東堂)으로 불러들여 만났다. [예]실불이 나아가 말했다. “저희 나라는 정성을 대국에 잇대고, 여러 대에 걸쳐 정성을 다하여 토산물을 바치는 데 어김이 없었습니다. 다만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흰 마노[珂]는 섭라(涉羅)에서 나는 것인데, 부여는 물길(勿吉)에게 쫓기는 바 되고, 섭라는 백제에 병합되었습니다. 두 물건이 왕의 창고에 올라오지 못하는 것은 실로 두 도적 때문입니다.” 세종이 말했다. “고구려는 세세토록 상국(上國)의 도움을 입어, 해외에서 제멋대로 다스려 구이(九夷)의 교활한 오랑캐들을 모두 정벌하였는데, 작은 술그릇이 비는 것..
우영(優永) 삼국사기 권 제19(고구려본기 제7) 문자명왕본기 : 12년(503) 겨울 11월에 백제가 달솔(達率) 우영(優永)을 보내 군사 5천을 거느리고 수곡성(水谷城)을 들이쳤다.
흥안(興安) 고구려 제22대 안장왕 이름이다. 삼국사기 권 제19(고구려본기 제7) 문자명왕본기 : 7년(498) 봄 정월에 왕자 흥안(興安)을 태자로 삼았다. 삼국사기 권 제19(고구려본기 제7) 안장왕본기 : 안장왕(安臧王)은 이름이 흥안(興安)이고 문자의 맏아들이다. 문자명왕이 재위 7년에 태자로 삼았으며 28년에 왕이 죽자 태자가 즉위했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22대 안장왕(安藏王)은 이름이 흥안(興安)이다. 기해년에 즉위해 12년을 다스렸다.삼국사기 권 제26(백제본기 제4) 성왕본기 : 7년(529) 겨울 10월에 고구려왕 흥안(興安)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와서 북쪽 변경의 혈성(穴城)을 함락하였다. 좌평 연모(燕謨)에게 명해 보병과 기병[步騎] 3만 명을 거느리고 오곡(五谷)의 벌판에서..
승천(升千) 삼국사기 권 제19(고구려본기 제7) 문자명왕본기 : 원년(492) 봄 3월에 위(魏) 효문제(孝文帝)가 사신을 보내, 왕을 사지절(使持節)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 정동장군(征東將軍) 영호동이중랑장(領護東夷中郞將)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으로 임명하고, 의관·복물(服物)·거기(車旗) 장식을 주었다. 또 왕에게 “세자를 보내 입조케 하라”고 명했지만, 왕은 병을 이유로 거절하고, 종숙(從叔)인 승천(升千)을 보내 사신을 따라 입궐하게 하였다.
조다(助多) 삼국사기 권 제19(고구려본기 제7) 문자명왕본기 : 문자명왕(文咨明王)은 이름이 라운(羅運)이고 장수왕 손자다. 아버지는 왕자이며 고추대가인 조다(助多)인데, 조다가 일찍 죽자 장수왕이 궁중에서 기르면서 대손(大孫)으로 삼았다. 장수왕이 재위 79년 만에 죽자 이어 즉위했다.
장수왕(長壽王) 삼국사기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장수왕본기 : 장수왕(長壽王)은 이름이 거련(巨連)이고 광개토왕 맏아들이다. 신체가 크고 기개가 호탕하며 뛰어났다. 광개토왕이 18년에 태자로 삼았으니 22년에 왕이 죽자 즉위했다. 원년(413)에 장사(長史) 고익(高翼)을 진(晉)나라에 보내 표(表)를 올리고, 붉은 무늬있는 흰 말을 바쳤다. 안제(安帝)가 왕을 고구려왕(高句麗王) 낙랑군공(樂浪郡公)에 봉했다. 2년(414) 가을 8월에 이상한 새가 왕궁에 모여들었다. 겨울 10월에 왕이 사천(蛇川)의 들로 사냥나가 흰 노루를 잡았다. 12월에 서울에 눈이 다섯 자나 내렸다. 7년(419) 여름 5월에 나라의 동쪽에 홍수가 나자 왕이 사신을 보내 위문했다.12년(424) 봄 2월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예방했다. 왕..
강왕(康王) 삼국사기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장수왕본기 : 79년(491)…겨울 12월에 왕이 죽었다. 나이 98세였으며, 왕호를 장수왕이라고 하였다. 위나라 효문제(孝文帝)가 이것을 듣고, 흰 위모관(委貌冠)과 베 심의(深衣)를 지어 입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를 표했으며, 알자(謁者) 복야(僕射) 이안상(李安上)을 보내 [왕을] 거기대장군 태부(太傅) 요동군 개국공 고구려왕으로 추증 책봉하고, 시호(諡號)를 강(康)이라고 하였다.
여노(餘奴) 삼국사기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장수왕본기 : 68년(480) 여름 4월에 남제(南齊) 태조(太祖) 소도성(蕭道成)이 왕을 표기대장군으로 책봉했다. 왕은 사신 여노(餘奴) 등을 보내 남제에 조빙케 했는데, 위나라 광주(光州) 사람이 바다에서 여노 등을 붙잡아 [위나라] 대궐로 보내니 위 고조가 왕에게 조서를 보내 책망했다. “[소]도성이 친히 그 임금을 죽이고 강남에서 [황제의] 칭호를 도용하였다. 짐은 망한 나라를 옛 땅에서 다시 일으켜, 끊긴 대를 유씨(劉氏)에게 잇게 하려 한다. [그런데] 경은 우리 국경을 넘어 외국과 교섭하고, 찬탈한 도적과 멀리 통교하니, 이것이 어찌 번신(蕃臣)이 절개를 지키는 의리하고 하겠느냐? 이제 한 번의 잘못으로 경의 이전의 정성을 덮을 수 없어 사신을 돌려보내니..